[과학] 조선 정조대왕의 수원화성 축성공사 위민정신, 창원 유씨 부인 격쟁 사연
과학

[과학] 조선 정조대왕의 수원화성 축성공사 위민정신, 창원 유씨 부인 격쟁 사연

인사이트인포 2025. 7. 18.
728x90

정조대왕(正祖, 1752~1800)은 조선의 제22대 왕으로, 개혁과 문화 발전에 힘쓴 군주였으며 규장각 설치, 탕평책 추진, 장용영 창설, 수원 화성 건설, 금난전권 폐지, 신해통공 실시, 문체반정 등의 정책을 통해 조선 사회를 변화시키려 했습니다. 또한 학문을 중시하여 실학자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고, 문물제도를 정비하며 조선 후기 문화 부흥을 이끌었습니다. 그의 통치는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평가되며, 강한 왕권을 바탕으로 왕도정치의 모범을 보였습니다. 오늘은 정조대왕의 업적 중 한가지인 수원화성 축성과 관련되어 백성들을 위하는 위민정신과 창원 유씨 부인에 얽힌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1. 백성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고민한 정조대왕의 위민정신

정조는 팔달산 아래 새롭게 조성된 읍치에서 농업을 활성화하여 백성들을 배불리 먹이고자 하였다. 척박한 토질을 바꾸기 위해 백성들에게 퇴비 증산을 지시하는 한편 성문 밖에 만석거를 만들고, 그 주위에 대유둔 이라는 국영농장을 조성하였다. 백성들은 이 땅을 임대받아 수확량의 50%는 세금으로 내고 50%는 자신들이 갖게 되었다. 또한 내탕금으로 소 10마리를 사들여 둔전 경작인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수원화성 축성 공사에 부렸던 소 32마리도 둔전 백성들에게 주어 모두 42마리로 농사를 짓게 하였다. 아울러 논을 경작하는 사람들의 이름, 경작하는 땅 크기 등 모든 내용을 기록한 토지대장을 만들어 둔전 관리자들의 횡포를 견제하는 장치로 삼았다. 이러한 정조의 깊은 관심으로 대유둔 일대의 농사는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만석거 축만제
만석거 축만제

 

2. 수원화성 축성 공사를 위해 수고하는 장인들을 위한 배려

공사 기간동안 정조는 감독관과 여러 장인들에게 여름과 겨울에 더위와 추위를 막을 물품을 내려 주었다. 척서단은 더위 먹은 사람이나 더위에 몸이 쇠약해진 사람을 치료하는 환약으로 정조는 1794년 6월 25일에 척서단 4천 정을 장인들에게 하사하였다. 또 1795년 11월에는 장차 닥쳐올 추위에 대비해서 털모자와 무명을 준비해 장인 한 사람당 모자 하나에 무명 1필씩을 나눠 주었다. 또한, 정조는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음식도 하사하였다. 정조가 수원화성에 행차할 때 해가 바뀌어 공사를 새로 시작할 때, 여름 무더울때 또는 공사가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음식을 내렸는데 모두 11차례 이루어졌다. 1794년 9월에는 장인과 일꾼 한사람에게 흰떡 두 가래에 수육 한 근, 술 한 그릇이 돌아가도록 했고, 보통 때는 밥 한 그릇과 국 한 그릇, 생선 자반 두 마리씩을 내렸다. 따로 특별한 상을 내리기도 했는데, 1795년 모친의 회갑연 때 공로에 따라 차등을 두어 장인들에게 무명, 베, 쌀을 상으로 하사하였다.

수원화성 축성공사
수원화성 축성공사

 

3. 백성들과 함께 나누는 모친의 회갑연

1795년 모친의 회갑연 다음날 화성행궁 정문인 신풍루에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주는 행사를 진행하였다. 화성부에 사는 홀아비, 과부, 고아, 독자(소년소녀가장) 539명과 가난한 백성 4,813명에게 쌀과 소금을 나눠주고 죽을 쑤어 먹였다. 음식물이 분배되는 동안 정조는 신풍루에 올라가 이를 지켜보았고 백성들에게 나눠줄 죽을 직접 맛보는 등 관심을 기울였다. 낙남헌에서는 70세 이상 관리와 80세 이상 서민 노인 384명, 회갑을 맞은 노인 171명을 불러 성대한 양로 잔치를 베풀었다. 정조는 잔치에 참여한 노인들에게 비단과 명아주 줄기로 만든 지팡이를 상으로 하사하였다.

혜경궁 회갑연
혜경궁 회갑연

 

4. 백성들의 근심을 더어주려는 정조의 마음

정조는 원행을 통해 직접 백성들의 생활을 살피려고 하였다. 원행 때마다 상언(백성들이 임금을 직접만나 억울한 일을 호소하는 것)이나 격쟁(징을 치고 나와서 호소하는 것)을 듣고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도록 지시하였는데, 능행 중에 진행된 상언이 3.232건, 격쟁이 123건이나 되었다. 1795년 원행 때 경사도 창원의 유씨 부인이 격쟁하여 남편의 억울한 죽음을 호소호자 정조는 환도 후 안핵사를 파견하여 일을 바로잡도록 하교하였다.

 

5. 경상도 창원의 유씨 부인 격쟁 사연

경상도 창원의 유씨 부인의 남편은 정준이라는 선비였다. 당시 창원 부사 이여절이 구실을 붙여 마을 사람들을 잡아다가 규정보다 과한 형벌과 고문을 가해 30여 명이 죽는 일이 벌어졌다. 이를 고발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집을 헐어버린 후 마을 밖으로 내쫓기도 하였다. 정준이 이여절의 이러한 잘못을 지적하자, 이여절은 정준에게 조사 업무를 시킨 후 결과에 문제가 있다고 트집을 잡아 심하게 매질하여 감옥에서 죽게 내버려 두었다. 유씨 부인의 격쟁 이후 파견되었던 안핵사가 진상을 보고하자 정조는 크게 노하여 이여절은 물론, 이를 제대로 감독하지 못한 경사도 관찰사도 잡아들여, 백성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잘못을 조사한 뒤 법에 따라 처벌하도록 지시하였다.

격쟁
격쟁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