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의 성곽은 국방과 행정을 위한 중요한 구조물로, 다양한 형태와 기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성곽으로는 한양도성이 있으며, 이는 조선의 수도 한양을 보호하기 위해 축조된 도성입니다. 오늘은 경기도 지역에 위치한 오산 독산성 세마대와 김포 문수산성에 대해 알아볼게요.
1. 조선 성곽의 주요 특징 종류
도성(都城)은 수도를 방어하기 위한 성곽으로, 한양도성이 대표적이며 읍성(邑城)은 지방 행정 중심지를 보호하기 위한 성곽을 말하며, 산성(山城)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방어력을 극대화한 성곽입니다. 또한 진보(鎭堡)는 군사적 요충지에 설치된 방어 시설을 말합니다. 조선 성곽은 돌과 흙을 이용해 축조되었으며, 성문과 옹성(甕城), 암문(暗門) 등의 방어 시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특히, 산지가 많은 한반도의 지형적 특성을 반영하여 산성이 발달하였고, 자연 지형을 활용한 독특한 구조를 보였습니다.
2. 독산성 세마대
독산성 세마대는 경기도 오산시 지곶동에 위치한 삼국시대의 성곽으로, 대한민국의 사적 제140호로 지정된 문화유산입니다.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권율 장군이 왜군을 물리친 전략적 요충지로 유명합니다. 특히, 권율 장군이 흰 쌀로 말을 씻는 시늉을 해 왜군을 속였다는 전설이 전해지며, 이와 관련된 장소가 바로 세마대(洗馬臺)입니다.
현재 독산성은 트레킹 코스로도 인기가 많으며, 성곽을 따라 걷다 보면 보적사와 세마대를 함께 둘러볼 수 있습니다. 오산시 지꽂동 155 번지 일대의 독산에 위치하고 있다 독산성은 독산의 7-8부 능선에 축조한 태외식 석축산성이다. 독산성은 백제가 축성한 고성으로 백제시대와 통일신라, 고려를 거쳐 임진왜란 때까지 이용된 성이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이곳은 주요 격전지 가운데 하나이다.
1592 년 김천익 군사가 이곳에 주둔한 바 있으며, 이듬해에는 전라도관찰사 겸순변사였던 권율이 만의 근왕병을 이끌고 북상하다가 이곳에 진을 치고 왜군을 물리친비 있다. 1594 년 경기도관찰사 유근이 이 산성을 수축하였고, 1595 년 포루를 갖추었으며, 597 는 왜군의 조총을 방어하기 위하여 석차와 포치를 배치하고 상밖에 목책을 설치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이 종료되고 독산성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1610 년(광해군 2) 방어사 변응성이 수축하였다. 이후에도 수보를 계속하였으며, 1796 년에는 수원성 축조와 함께 개축하였고, 1804 년에는 산성 남쪽에 암문을 설치하였다. 독산성의 성벽 둘레는 1 400m 정도이고 높이는 llm 이다. 982 년 복원된 성벽은 길이 1,095m 이고 높이는 lm 내외이다. 성벽에는 치성 개소, 문지소가 복원되었으며,일부 는 여장을 축조하였다. 성벽의 기단은 할석을 불규칙하게 안쪽으로 쌓아 올렸고 외벽은 장방형 혹은 정방형의 치성석으로 마감하였다. 내벽은 현재 복원 성벽이 안쪽으로 물려 쌓아져 불확실한 , 내벽쪽에서 일부 성토층이 확인되었다. 인위적으로 대지를 조성하여 건물터로 사용하였는데 화성지( 城誌) 에는 167.5 칸의 건물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내에서는 기와, 토기편 이 수습된다. 226) 사적 140호 지정되어 있다.
3. 김포 문수산성
문수산성은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산성으로, 사적 제139호로 지정된 문화유산입니다. 이 산성은 숙종 20년(1694년)에 축성되었으며, 강화 갑곶진과 함께 강화해협을 방어하는 요새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병인양요(1866년) 당시 프랑스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유명하며, 이후 순조 12년(1812년)에 보수되었습니다. 김포시 월꽂면 포내리 · 성동리 문수산(해발 376m) 일대에 소재한다. 문수산성은 강화도의 갑꽂진과 더불어 강화도 입구를 지키는 중요한 성으로 1694 년(숙종 20) 에 축성되었다.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로 가는 길목이 봉쇄당하여 강화도로 파천하지 못하여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게 굴복을 당하자 이후 강화도와 연결되는 길목인 통진의 갑꽂나루에 대한 군사적인 방비의 펼요성이 제기되어 강화도로 도강하는 길목인 이곳에 산성을 축조하게 된 것이다.
이후 문수산성은 한양 도성으로 진입하려는 외세를 막기위한 관문으로 중요시되었으며, 강화도에 대한 외곽 방어와 함께 강화도를 거쳐 내륙으로 진입하려는 적을 저지하는 중요한 관방요충이 되었다. 실제 1866년 병인양요 때에는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군의 내륙진출을 저지하기 위한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에 산성에 대한 내용은 여지도서(與地圖 에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성곽의 축조는 1693년(숙종 19 년) 가을 임금이 이 산을 보고 강화도를 지키는 관방중지(關防 地)라 하고 지도를 그려 바치게 하였으며, 1694년 삼군문에 명령하여 둘레5,529 보의 성을 쌓게 하고, 별장 명, 본부중군감관 명, 수첩군관 90 명, 총섭 , 군기감관 8 명, 진군관 20 명, 사졸 56 명 등으로 하여금 차례로 번을 서게 하였다. 문수산성은 김포 통진과 강화의 경계지점에 있는 석축산성으로 1728 년(영조 4) 기을에 개축하여 본부의 연성의 관례에 따라 진영 소속으로 삼아 통진 속오군이 그 성첩(城밸)의 관리를 나누어 하며 매년 월 안에 퇴락한 곳을 맡아 수축하도록 하였다”라고 하였다.
문수산성은 문수산 정상부와 해안쪽으로 뻗은 능선을 이용하여 축조한 성벽(남, 북벽)과 강화수로와 동일한 방향으로 해안과 접하여 축조된 서벽으로 나누어 진다. 산성의 총 둘레는 201m , 평면형태는 동서방향이 장축인 장방형이며,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형태이다. 이 산성은 1812 년 대대적인 중수가 있었으나 현재 해안쪽의 성벽과 문루는 거의 파괴되어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으며 나머지 구간의 성벽과 시설물 등은 일부 잔존하고 있다. 북문은 복원공사가 이루어졌으며, 성내에는 삼림욕장을 비롯한 관광시설과 군부대, 민가등이 자리잡고 있어서 원형이 크게 훼손된 상태이다.
이곳은 1996 년 한양대 박물관에 의해 남서편 일부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1998 년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에서 김포시 군사유적에 대한 지표조사가 이루어졌고 2000 년에는 문화재연구소에 의해 군사보호구역 지표조사가 실시되었다. 1992 년부터 김포시에서는 이 산성에 대한 보수 · 복원계획을 수립하여 이미 북문과 남문 및 일부 성벽에 대한 복원공사가 이루어졌다. 북문에서 문수산 정상으로 뻗은 지점에는 할석을 이용하여 축조한 성벽이 13 단 정도 남아 있고, 정상에서 남문쪽 방향으로는 화강암을 방형으로 치석하여 축조되어 있어서 구간별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후대의 개축 흔적이다.
북문쪽 성벽은 40 60cm의 성돌을 수평을 맞추어 쌓고 틈새에는 쐐기돌을 박았다. 남벽은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성벽 잔존 높이는 2m 내외이다. 남벽 성벽 사이에는 축조당시 축성을 담담하였던 책임자 등을 기록한 명문이 남아 있다. 성내에는 문지, 용도(벼道), 장대지예정 址) 등이 남아 있으 며, 기와, 토기, 철제편자, 자기편 등 여러 유물이 수습된 바 있다. 227) 사적 139호로 지정 되어관리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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